
세상 그 누구보다 장난기 넘치는 표정을 짓다가도, 눈을 한번 찡긋하면 순식간에 이닝이 끝나 있다. 허허실실 세 타자를 가볍게 잡아낸 뒤 대수롭지 않다는 듯 더그아웃을 향해 걸어간다. 팬들이 송은범 하면 떠올리는 대표적인 모습이다.
1984년생 베테랑 우완 송은범은 인천 동산고를 졸업하고 2003 KBO 신인 드래프트 1차지명으로 고향 팀 SK 와이번스(SSG 랜더스의 전신)에서 프로 무대에 첫발을 디뎠다. 그 뒤 KIA 타이거즈, 한화 이글스, LG 트윈스를 거치면서 통산 680경기(194선발) 1,454이닝 동안 88승 95패 57홀드 27세이브 평균자책 4.57의 준수한 성적을 쌓았다.
프로에서 21년간 활약한 송은범은 지난 시즌 뒤 LG에서 방출 통보를 받았다. 이에 올겨울 현역 연장을 위해 새 둥지를 찾았지만, 상황이 여의찮았다. 송은범은 결국 정든 마운드를 떠나기로 했다. 스포츠춘추가 고심 끝에 현역 은퇴를 결정한 송은범의 진솔한 얘길 들어봤다.
은퇴를 결정했다고 들었습니다.
예. 정말 아쉽지만, 마음을 접을 때가 온 것 같아요. 어딜 가더라도 좋은 활약을 펼칠 자신이 있었고, 몸 상태 역시 좋다고 생각했는데, 팀들이 보기엔 좀 부족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무래도 올해로 ‘마흔 살’이 된 제 나이도 많이 신경 쓰이지 않았을까요.
LG에 합류한 뒤 두 번째 시즌인 2021년 불펜에서 좋은 활약(56경기 4승 2패 6홀드 2세이브 평균자책 4.50)을 펼쳤습니다. 그런데, 이듬해 경기 도중 ‘부상’이란 악재가 송은범 선수를 덮쳤습니다.
(한숨을 내쉬며) 맞아요. 3년 전 오른쪽 무릎 인대를 다쳤습니다. 지금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그게 미련이 가장 남네요. 그 부상으로 수술대에 올랐고, 또 오랜 시간 재활과 훈련을 병행해야 했거든요.
그전까지 프로 생활 내내 큰 부상 없이 뛴 걸로 압니다. 그렇기에 당시 무릎 부상이 끼친 영향이 많이 컸던 모양이네요.
흔히 투수들에게 ‘큰 부상’이라고 하면 대부분 팔이나 어깨 쪽이잖아요. 저는 그런 게 없었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무릎을 다치면서 많은 생각이 들게 됐습니다. 게다가 그때부턴 ‘나이’를 고려해야 했죠.
2021년이면 송은범 선수가 30대 중후반 때였습니다.
그렇죠. 제가 37세에서 38세로 넘어가는 해에 무릎을 다쳤어요. 수술하고 나서 재활 차 공을 들었는데, 느낌이 전과 너무 달라서 깜짝 놀랐습니다. 아프고 난 뒤 오른발 쪽 근육이 왼발에 비해 확 줄었더라고요. 예전의 감각을 찾기 위해선 그만큼 근력 운동을 열심히 해야 했죠.
아쉬운 부상을 겪은 후론 점차 1군 출전 시간이 줄어들었습니다.
온갖 시도를 다 해봤습니다. 무릎 인대 수술 당시 박았던 핀을 1년 만에 제거했어요. 어차피 언젠가는 고정된 핀을 뽑아야 했고, 이왕이면 빨리하고 싶었습니다. 혹시나 그걸 통해서 좋았던 감각을 하루빨리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했거든요. 지난 2년의 시간을 그렇게 보냈습니다. 무릎 부상 여파와 별개로 여전히 쌩쌩하거든요. 공을 던질 힘은 충분합니다. ‘이대로 그만두기엔 너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죠.
올겨울 입단 테스트 등을 통해 여러 구단의 문을 두드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랬죠. 마운드에서 공을 더 던지고 싶었는데, 결과적으론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작년(2023년) LG에서 나오면서 몸 상태에 워낙 자신이 있었고, 볼 스피드도 여전히 좋았거든요. 아내를 포함해 가족들과 많은 대화를 나눴어요. 미련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젠 결정해야 할 때가 온 거죠.
송은범의 기억 속 ‘SK 왕조 그리고 김성근 감독, 투심 패스트볼’
프로에서 20년 넘게 활약했습니다. 또 다양한 팀을 경험하기도 했는데요.
그중 기억에 가장 남는 건 친정이자 고향 팀인 SK입니다. 어린 시절 1차 지명을 받기도 했고, 찬란했던 순간을 함께해서 그런지 생각할 때마다 기분이 늘 남달라요.
송은범 선수는 이른바 ‘SK 왕조’ 시절 마운드 한 축으로 활약했습니다. SK 유니폼을 입고 한국시리즈 우승(2007, 2008, 2010년)을 3차례나 경험했고요.
(망설임 없이) ‘범접할 수 없는 팀’, 그때 SK는 그런 팀이었어요. 그러고 보니 제가 우승해 본 지도 10년이 넘었네요. 너무 어렸을 때 우승을 경험해서 그런 걸까요. 제 스스로에게 아쉬운 기분도 살짝 듭니다.
말씀을 들으면, 우승했을 때 그 기분을 다시 경험하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맞아요. 주변 얘길 듣다 보면 ‘베테랑이 된 후에 느끼는 우승은 많이 다르다’고 하더라고요. 그 기쁨이 다른 차원으로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요. 저는 어릴 때 우승을 해봐서 그런 게 너무 궁금했어요. 형들하고 선배들이 눈물 흘릴 때는 저는 멋모르고 마냥 웃기만 했거든요. 이제 나이가 들고 난 후론 제가 울 수 있는 기회가 없었고요(웃음).
프로에서 선발, 중간, 마무리 역할을 모두 오가면서 좋은 활약을 펼쳤지만, 선발로 가장 빛났던 건 역시 SK 시절이었습니다.
계기가 있었어요. SK에서 김성근 감독님을 만나게 되면서 야구관이 바뀔 수 있었습니다. 그 시기에 야구에 대한 마음가짐이 많이 변했어요. 그 덕분에 실력도 전보다 일취월장할 수 있었고요.
야구를 다시 배운 시기였을까요?
아뇨(웃음). 그것보단 ‘인생을 다시 한번 되돌아본 시기’에 가깝겠네요.
어떤 의미에서 야구관이 변했나요?
더 이상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게 됐어요. 물론 제가 정답은 아니겠죠. 때론 어떤 선수들에겐 변화가 독이 될 수도 있을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뭐 어때. 안 풀리면 좋았던 폼으로 원상 복귀하면 되는 게 아니야?’라고 생각의 틀을 바꿨어요. 그게 김성근 감독님이랑 함께하면서 얻은 교훈입니다.
김성근 감독은 독특한 훈련으로도 유명합니다.
(크게 웃으며) 맞아요. 항상 색다르고 특이한 걸 계속 시키세요. 투수들은 특히 예민한 성향이 있잖아요. 때론 자기가 가진 걸 잊지 않기 위해서 그 루틴을 고집할 때도 있어요. 그게 틀린 건 절대 아니에요. 그래도 저는 김성근 감독님 밑에서 다양한 걸 시도해 봤고, 스펀지처럼 잘 흡수된 것 같아요. 그런 경험이 나중에 한화 가서도 큰 힘이 됐죠.
투심 패스트볼을 익혀 핵심 불펜으로 거듭난 한화 시절과 연결되는 대목이군요.
한화에 합류한 뒤에 구종 추가에 대한 고민이 있었고, 그때 정민태 투수코치님은 포크볼을 추천하셨죠. 그런데 막상 포크볼을 던지면 팔꿈치에 대한 중압감이라든지 그런 부분이 확실히 있더라고요. 시행착오 끝에 대안으로 찾았던 게 바로 투심 패스트볼이었습니다. 손가락을 좀 더 좁혀서 투심을 던지게 된 거죠.
그간 던져온 포심 패스트볼 대신 투심을 던진 순간이군요. 송은범 선수는 당시 30대 중반에 접어들기 시작한 베테랑이었습니다. 하지만 변화를 전혀 겁내지 않았단 점에서 놀랍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제 성향이 정답은 꼭 아니라고 생각해요. 다만 김성근 감독님 영향으로 변화를 시도하는 데 거리낌이 없어진 게 있죠. 오랫동안 야구하면서 감사하게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밈’이 된 송은범의 표정 “재밌게 기억해 주신다면 감사할 따름”
오랜 시간 야구를 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동료는 누구입니까.
저 스스로 ‘복 받았다’고 생각해요. 커리어 내내 뛰어난 포수들과 호흡을 맞췄으니까요. 누구 한 명 손꼽기에도 어려울 정도입니다. ‘포수’라는 역할이 정말 어려워요. 마운드 위 투수랑 교감하면서 수비도 신경 써야 하는 위치잖아요. 포수들과 호흡이 크게 모나지 않고 좋았던 게 지금까지 야구할 수 있었던 비결 같기도 해요. 늘 저에게 맞춰준 포수들에게 이 자릴 빌려 감사함을 전하고 싶습니다.
송은범 선수하면 밈(Meme)도 있잖아요. 마운드 위 얼굴을 찡그리는 표정으로 기억하는 팬들이 많은데요.
(웃으며)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게 처음엔 몰랐는데, 친구들이나 주변에서 다들 알려주더라고요. 의식하거나 일부러 그런 건 아닙니다. 경기 도중에 저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표정이 나오는 거죠.
팬들은 경기 중 송은범 선수의 그런 표정을 재밌게 즐기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유쾌한 이미지이기도 하잖아요. 팬들께서 저를 재밌게 기억해 주신다는 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프로에서 21년간 활약하면서 다양한 보직을 경험했습니다. 선발, 중간, 마무리 가운데 가장 애착이 가는 역할이 궁금합니다.
(망설임 없이) 선발이죠. 때론 ‘선발로 쭉 뛰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도 해봤습니다. 그도 그럴 게 시즌 중에 선발과 불펜을 오가는 게 참 힘든 일입니다. 이게 두 자릴 오가면서 기량을 유지한다는 게 말이 안 될 정도로 고돼요. 지금 프로야구에선 그런 역할을 보긴 어렵죠. 갈수록 없어지는 추세고요. 제 경험을 떠올리면 후배들에겐 참 바람직한 흐름이라 생각합니다.
조금 전 말씀도 그렇고, 훗날 ‘지도자’로 변신한 송은범 선수도 기대됩니다. 그와 관련해서 생각이 있으신가요?
미래의 일은 아무도 모르죠. (이내 웃으며) 하지만 제가 결정할 수 있나요? 저를 데려갈 데가 있어야죠. 만일 제가 가진 경험을 후배들에게 나눌 기회가 생긴다면, 그건 그거대로 흥미로울 것 같아요.
마침 예능프로그램 ‘최강야구’에 인연이 깊은 분들이 있는데요.
아직 진로 관련해선 정해진 게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도 ‘현역 은퇴’라는 말이 좀처럼 실감이 나질 않아요. 마운드 위에서 더 던지고 싶은 마음도 있고요. 어느 방식이든 팬들께 다시 한번 인사드릴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최강야구’ 트라이아웃에도 참여하고 싶어요.
팬들께 따로 인사드릴 기회가 없던 걸로 압니다. 끝으로 이 자릴 통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오랜 시간 야구하면서 정말 많은 응원을 받았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지켜봐 주신 분도 많아요. 또 성적이 좋을 때나 안 좋을 때나 항상 변함없이 응원을 보내주신 분들까지, 모두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현역 선수로 야구장에서 인사드리는 건 이제 어렵게 됐지만, 팬들께 다른 모습으로 또 인사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http://www.spochoo.com/news/articleView.html?idxno=107962
‘은퇴’ 송은범이 돌아본 21년 “고향팀 SK, 그리고 김성근 감독님” [춘추 인터뷰] - 스포츠춘추
[스포츠춘추]세상 그 누구보다 장난기 넘치는 표정을 짓다가도, 눈을 한번 찡긋하면 순식간에 이닝이 끝나 있다. 허허실실 세 타자를 가볍게 잡아낸 뒤 대수롭지 않다는 듯 더그아웃을 향해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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